토론연극 ‘라인’ 포스터
토론연극 ‘라인’ : Z세대가 답하는 평화&민주주의
서울--(뉴스와이어)--강원도 동해의 한 고등학교 강당. 객석에 있던 학생이 무대 위로 올라간다. 관객으로서 지켜봤던 공연 속 상황을 자신이 생각하는 좀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꿔보기 위해서다.
관객으로 거리를 두고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바를 직접 무대 위 상황 속 배우 당사자가 돼 말과 행동으로 실천해 보는 순간이다. 이제 무대는 현실이 되고, 무대 위 상황은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현재가 되며, 미래를 연습해 보는 실험장이 된다. 질문하는 연극, 관객이 주인공이 되는 연극, ‘보는’ 연극에서 ‘하는’ 연극의 형식으로 관객이 스스로 답을 찾아보는 ‘과정’을 공유하는 공공의 장, 토론연극의 현장이다.
사단법인 행복공장과 연극공간-해가 11월 4일부터 12월 23일까지 전국 13개 지역 13개 학교를 순회한 토론연극 ‘라인’에 4000여 명의 청소년이 참여해 만족도, 재참여 의사, 평화와 민주주의 가치 이해, 교육적 유익성 등 전 항목에서 90% 이상의 긍정 평가를 기록하며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수업이 아닌 ‘공연’, 예술이 만드는 배움의 마법
‘라인’은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공연’이다. 무대, 조명, 음악, 배우의 연기가 어우러진 살아 있는 예술 작품이다. 그런데 이 공연이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장 강력하게 가르쳤다.
비결은 ‘예술의 힘’이다. 예술은 상상하게 하고, 공감하게 하고, 스스로 깨닫게 한다. 교과서의 정답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무대 위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등장인물의 입장이 되어보고, 갈등 상황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기만의 해법을 찾아가는 것이다.
대전의 한 학생은 직접 무대에 올라가 연기하는 경험이 특별했고, ‘아, 민주주의가 이런 거구나’ 체감됐다고 말했다.
세종시 중학교의 한 교사는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산만한데 오늘은 정말 집중하고 즐거워하더라며, 연극이라는 형식이 아이들을 자발적 학습자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관객이 배우가 되는 ‘토론연극’, 상상이 행동이 되는 순간
‘라인’은 단순히 보는 공연이 아니다. ‘토론연극(forum theatre)’이라는 특별한 형식으로 관객이 무대 위 배우가 돼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간다.
무대 위 공연이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의 절정에서 끝나면 관객은 공연 속 문제의 원인과 개선의 방법을 탐색하고, 자신이 생각한 개선 방법을 무대 위 ‘등장인물’, 즉 관객-배우(spect-actor)가 돼 직접 그 생각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도록 안내된다.
관객-배우로서 머릿속 상상을 무대 위 행동으로 구현하는 순간 추상적 개념은 구체적 사건으로 체감하고, 구경꾼이 아닌 ‘당사자’로서 겪는 현실과 갈등, 다양한 선택과 딜레마를 속에서 스스로 깨닫고 배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역시 현실과 상상 사이의 차이를 관찰하고 인지하면서 또 다른 가능성을 깨닫고 배우게 된다.
대전의 한 학생은 공연 속 후보자들이 자기 신념을 말하면서도 정작 행동은 다르게 하는 걸 보며 나는 내 가치대로 살고 있나 스스로 돌아보게 됐다고 밝혔다. 누가 가르쳐준 게 아니다. 연극을 통해 상상하고 공감하며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문화예술이 열어 주는 ‘공감의 통로’
세계적 석학 마사 누스바움은 저서 ‘인간성 수업’에서 ‘예술이 시민성에 필수적인 상상력을 길러주고, 이는 자기중심적 분노의 해독제가 돼 이질적 타인에 대한 공감과 포용력을 키운다’고 했다.
‘라인’은 바로 그 예술의 힘을 증명한다.
무대 위에서는 평화를 위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진 후보자들이 등장한다. 모두가 옳아 보이지만, 서로 갈등하고 충돌한다. 청소년들은 각 인물의 입장이 돼 그들의 가치관을 이해하고, 무대 위에서 직접 연기하며 그 갈등을 체험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는 공감 능력이 자란다.
강원도 동해의 한 학생은 남녀갈등, 세대갈등으로 사회가 점점 쪼개지고 있는데, ‘라인’은 우리를 다시 하나로 뭉쳐줄 수 있는 공연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은 지금 심각한 갈등 속에 있다. 국민 90.8%가 ‘사회 갈등이 심각하다’고 느끼고, 전 세계 28개국 중 갈등 인식 1위 국가로 꼽혔다. 민주주의 지수도 10계단 추락해 ‘결함 있는 민주주의’로 강등됐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더 많은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상상과 공감의 경험이다.
서바이벌 오디션으로 만나는 민주주의, Z세대 감각으로 재해석
‘라인’은 무겁지 않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익숙한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형식으로 풀어냈다.
연극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게 뭘까?’라는 퀴즈쇼로 시작한다. 본 공연 무대에서는 힘, 자유, 평등, 경청, 포용을 주장하는 후보자들이 등장해서 시시각각 바뀌는 무대 세트와 음악, 조명, 영상이 어우러지는 감각적인 무대 위에서 각자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경쟁하고 투표를 이끌어낸다.
공연 후 ‘핫시팅’이라는 즉석 인터뷰 코너에서는 학생들이 등장인물과 대화하고, 클라이맥스로 학생들이 무대 위에 올라가 직접 연기하며 자신만의 해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평·민 캠페인’에서 포스트잇에 자기의 언어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정의하고 실천 방법을 제안함으로써 나의 일상으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확장시킨다.
‘라인’은 이렇게 총 100여 분의 시간 동안 문화예술 공연이 주는 재미와 몰입, 그리고 자유롭고 깊이 있는 배움으로 지루할 틈 없이 진행된다.
Z세대가 발견한 평화와 민주주의
‘평화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민주주의는 국민이 나라의 진짜 주인인 시스템’, ‘평화는 별거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 민주주의는 그 평화가 유지될 수 있게 하는 하나의 방법이니 다수든 소수든 의견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 공연이 끝나고 청소년들이 남긴 메시지는 명확하다.
갑작스러운 계엄의 경험, 우크라이나 전쟁, 가자지구 분쟁을 SNS로 실시간 보며 자란 세대답다.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사는 이들에게 평화는 교과서 속 단어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그래서 이들은 안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게 저절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지켜내야 하는 것임을. 이 깨달음은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연극이라는 예술을 통해 상상하고 공감하며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알고리즘 시대, 예술이 여는 ‘만남의 장’ 그리고 ‘시작점’
왜 지금 이런 공연이 필요할까? 알고리즘과 필터 버블로 비슷한 생각끼리만 모이는 시대다. 온라인에서는 익명으로 혐오를 표출하지만, 정작 얼굴 맞대고 다른 의견을 나누는 건 서툰 세대가 됐다.
인천의 한 교사는 요즘 아이들은 온라인에서 익명으로 싸우는 덴 익숙한데 얼굴 맞대고 다른 의견 나누는 건 서툴다며, 이 공연이 아이들에게 직접 만나 대화하고 함께 해보는 경험을 제공하면서 완벽한 답을 찾기보다 서로의 생각을 듣고 질문하는 시작점이 됐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평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사람들이 말과 행동을 통해 서로의 차이를 드러내고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공간’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라고 했다. ‘라인’의 무대는 바로 그런 시공간이다. 청소년들이 함께 모여 연극을 보고, 무대 위로 올라가 함께 연기하며,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떻게 공존할 것인가를 예술을 통해 탐색하는 공론장이다.
27년 토론연극 전문단체의 전문가가 만든 ‘분단국의 이야기’
2009년 설립 이래 문화예술을 활용한 다양한 성찰과 나눔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는 행복공장과 1997년 창단 이래 다양한 이슈의 토론연극 작업을 이어 있는 연극공간-해의 합작품 ‘라인’은 다가오는 새해 더 많은 청소년과 더 흥겹고 진지하게 평화 그리고 민주주의를 탐하는 공론의 장을 만들어 나가고자 한다.
‘라인’을 쓰고 연출한 연극공간-해 김현정 대표는 “분단국이라는 우리의 특수성을 반영해 ‘선(線)’을 모티브로 했다”며 “선은 38선처럼 우리를 가로막는 선도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가치를 연결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선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청소년들과 나누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기성세대와 다른 언어로 평화와 민주주의를 만들어갈 청소년들에게 많이 배웠다”며 “특히 전 세계에서 전쟁이 벌어지는 지금, 청소년들이 평화를 연극 무대 위에서 상상하고 체험하며 현실로 만들어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행복공장 측은 알고리즘 시대에 문화예술은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게 하고, 상상하게 하고, 공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며, 예술을 통한 자기주도적 배움이야말로 진정한 시민성 교육이라고 밝혔다.
갈등과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 4000여 명이 ‘라인’이라는 연극 무대 위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스스로 발견했다. 그리고 그들은 어른들보다 명확하게 답했다. ‘평화는 평범한 일상이고, 민주주의는 그걸 지키는 방법’이라고.
억압받는사람들의연극공간-해 소개
억압받는사람들의연극공간-해는 1997년 창설 이래 제3세계 연극의 아버지라 불리는 보알(A.Boal)의 연극방법론 ‘억압받는사람들의연극’을 토대로 하는 ‘토론연극(forum theatre)’과 즉흥재현연극인 ‘플레이백 씨어터(playback theatre)’ 기법을 활용한 작업을 지속해 오고 있는 교육, 치유, 응용연극 전문단체로, 다양한 개인과 사회의 문제 혹은 이슈를 연극을 통해 함께 ‘풀어내(解)’고, 개인과 공동체가 보다 건강하게 변화·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오고 있다.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담은 관객참여 연극으로 ‘양들의침묵’, ‘내가그린기린그림’, ‘기후야돌아와’, ‘헬프!비레인’, ‘우리집에왜왔니’, ‘오버더라인’ 등이 있으며, 장애/비장애 예술가, 활동가, 청소년, 교사, 이주노동자, 유학생, 기지촌여성, 결혼이주여성, 재소자, 소년원생, 새터민 등 다양한 커뮤니티와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를 통해 유의미하고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오고 있다.